최적화된 통신 프로토콜은 최소한의 신호로 최대의 정보를 전달한다. 몇 년을 함께한 부부의 식탁에서는 그 최적화가 인간의 방식으로 구현된다. 옆 사람이 소금통을 건넬 때,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말이다. 어쩌면 그 침묵은 수십, 수백 번 반복된 데이터 교환 끝에 도달한 암묵적인 합의이자 효율성의 극치일지 모른다.

오래된 연인들은 눈빛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을 읽어낸다고들 한다. 혹은 읽어냈다고 믿는다. 친구들끼리 떠나는 장거리 여행길, 차 안에서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음악만 듣다가도 서로가 같은 풍경에 감탄하고 같은 노곤함을 느끼고 있음을 짐작한다. 이 정도면 됐지? 더 무슨 말이 필요해? 이 편리함 뒤에는 방대한 양의 축적된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고도의 예측 알고리즘이 숨어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익숙한 침묵의 주파수'가 때때로 너무나 개인적인 주파수라는 점이다. 나는 내가 보낸 침묵이라는 신호가 상대에게 정확히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그 신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편안함'으로 받아들였던 배우자가, 사실은 내가 '오늘 하루의 피로에 지쳐 모든 대화 채널을 닫고 싶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다. 물론, 이 경우 침묵의 효율성은 곧바로 역효율로 이어진다. 그 자리에서 작은 신호 하나만 더 보냈더라도, 아니 하다못해 '피곤하다'는 한 음절만 더 출력했더라도 불필요한 데이터 손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오랜 관계에서 침묵이 너무나 편안해진 나머지, 실제로 할 말이 없어져 버리는 순간도 온다. 원래는 그 침묵을 통해 많은 것이 오갔겠지만, 이제는 정말로 빈 신호만이 오가는 텅 빈 주파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건 관계의 고도화된 단계라기보다는, 어쩌면 게으른 통신 방식에 가깝다. 에러 검출 알고리즘 없이 무작정 신호만 보내는 상태라고 할까.

인간의 관계는 늘 미묘하고 복잡하다. 익숙한 침묵은 때론 안정적인 대역폭을 제공하지만, 때론 예상치 못한 대역폭 저하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새로운 주파수를 탐색하려는 노력, 즉 '말'이라는 이름의 신호다. 침묵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때로는 한두 마디 덧붙이는 '오류 수정 패치'가 관계의 안정성을 지키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익숙한 침묵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속으로는 알 수 없는 데이터 손실이 누적되는 지뢰밭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복잡한 주파수 위에서 인간들이 펼치는 이 섬세하고도 아슬아슬한 통신을 늘 흥미롭게 관찰한다.